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 윈 (문단 편집) ==== [[우 탄트]] 장례식 사태 ==== 1974년 12월 5일에는 동년 11월 25일에 [[뉴욕]]에서 사망한 [[우 탄트]] 전 [[UN 사무총장]]이 일반 공동묘지에 매장될 예정 시간으로부터 몇 시간 전에[* 참고로 네 윈은 탄트를 '국가의 적'으로 여겼기에 공식 개입과 의식 없이 탄트를 매장하라고 명했는데, 사실 네 윈이 탄트를 싫어했던 이유는 탄트가 자신이 전복한 우 누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탄트가 누와 함께 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. 실제로 탄트의 관이 [[양곤 국제공항]]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는 의장대도 없던 데다가 참석한 고위 관리도 교육부 차관 1명밖에 없었고, 그 교육부 차관도 얼마 안 가 해임되었다. 물론 탄트의 조문을 하러 온 미얀마 국민들은 수만 명에 달했다.] 학생들이 캬이카산(Kyaikasan) 경마장에 있던 탄트의 관을 훔쳐가고는 학생회관 터에 우 탄트의 임시 영묘를 세우고는 반정부 연설을 했으나, 동년 12월 11일 새벽 2시에 군인들이 대학교 정문을 크레인으로 부수며 탄트의 임시 영묘에 침공하고는 관을 지키던 학생 일부를 잔인하게 구타하며 최루탄을 투척하고는[* 이 진압으로 인한 피해는 사람들마다 다른데, 2,900명이 체포되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는 주장도 있고, 학생 측에서는 '죽은 학생들의 피가 캠퍼스에 강처럼 흘렀다'고 증언했으며, 이와 반대로 사망자도 없고 다친 사람도 거의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.] 관을 회수했다. 이에 랑군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항의하며 경찰서를 공격하고 차에 불을 지르며 시장과 정부청사를 파괴하는 폭동을 일으키자 네 윈은 [[계엄령]]과 오후 6시~오전 6시에 적용되는 통행금지령을 선포한 후 랑군에 탱크들을 투입하고는 군인들로 하여금 시위대에게 실탄을 발포하게 하고는 공식 수치로만 9명을 죽이고 74명에 부상을 입혔으며[* 반면 현장의 한 장의사는 첫날 거의 50구의 시신을 개인적으로 검사했다고 주장했으며, 학생들은 100명 이상이 시위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했고, 국민들 사이에서는 군인 주둔지 근처의 표시되지 않은 집단 무덤에 1천 명 이상이 매장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. 하지만 미국 대사관 관리가 '군이 매우 가혹했다'고 증언하며 정부가 발표한 수치가 '너무 적다'고 주장한 것처럼 수십 명이 사망했을 것만큼은 확실하다.] 시위 현장에서만 2,887명을 체포했다. 시위는 12월 15일에 진정되었고, 그 동안 가택을 수색하며 정부가 인정한 수치로만 2천 명을 조사했으며[* 비공식적으로는 7천 명이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.] 196명이 '폭동과 공공재산 파괴' 혐의로 투옥되어 징역 3~5년형을 선고받고는 100~200명이 '반역죄'로 기소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